우리가 지금 을지로에 가는 몇 가지 이유

2019.03.13. (수)
  • #칼럼

‘을지로’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인상이 있다. 아마도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선 제조 업체 혹은 인쇄 업체가 빼곡히 들어찬 모습일 것이다. 서울 도심의 낡고 오래된 지역으로 손꼽히는 이 지역은 최근 레트로 열풍과 맞물려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레트로는 일반적으로 복고를 의미하는 용어지만 이번 레트로 트렌드는 이전과는 차이가 있다. 단순히 지나간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젊은 세대가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색다른 콘텐츠로서 레트로적 요소를 향유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지금 을지로를 즐겨 찾는 젊은 2030 세대에게 이 지역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요소는 상당히 낯설고, 그렇기에 '힙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을지로 지역의 오래된 것 사이에 새로이 깃든 ‘신인류’의 감각이다. 물론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섞여 있는 지역이 어디 이곳뿐이겠느냐마는, 그런데도 유달리 흥미롭게 느껴지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본래 을지로 골목 안쪽의 빈 건물에 처음 자리잡기 시작했던 건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실 겸 공간들이었다. 임대료가 비싼 1, 2층과 달리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고층을 작업실로 꾸민 이들은 작업에 몰두하는 동시에 자신의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레트로 열풍 이전에 이를 좇는 소수의 매니아 층이 점차 을지로를 찾기 시작했다. 이후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았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초기 자본금이 많지 않은 젊은 창업가들이 이곳에 하나둘 들어와 개성 있는 가게를 열었다.

인근의 종로나 광화문과 완전히 상반되는 분위기는 이곳만의 독특함을 더욱 부각했고, 대중에게 을지로라는 낯선 지역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변의 멀쑥한 고층 건물과 비교되는 낡은 건물들과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미로 같은 골목 안에서 공업소와 인쇄소 노동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투박하고 거친 분위기. 와인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지역에 생긴 가성비 좋은 와인 바처럼 주위 풍경과 대조를 이루는 세련된 가게들은 어제보다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층에게 매력을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지리적으로 서울의 중심지이자 2호선이 길게 지나는 덕분에 접근성도 좋으니 너나 할 것 없이 을지로를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교통 편의성과는 별개로 을지로에 새롭게 생긴 공간들이 ‘숨어 있다’고 표현할 만큼 찾아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새롭게 들어선 가게들은 대개 요란스러운 간판을 내걸지 않는다.  2년째 인쇄 관련 업체 건물 4층에 자리 잡고 있는 ‘호텔수선화’를 찾아가려면 건물 입구에 붙은 작은 간판 대신 같은 건물의 제책사 간판을 찾는 편이 빠르다. 기존 간판 사이에는 새로 간판을 달 만한 자리도 없고, 1층의 업무 특성상 물건을 옮기는 일이 많아 입간판도 놓지 못했다. 공간을 꾸미고 남은 자재에 이름을 적고 색을 칠해 달아 놓은 작은 간판은 최소한의 표식이다. 그저 길거리에 무심코 지나칠 법한 작은 입간판을 내놓거나, 이마저 없이 계단 안쪽에 붙은 포스터가 간판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특징 또한 을지로를 더욱 힙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마치 자신을 과시하려고 힘주는 태도보다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이 더욱 멋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누구나 올 수 있지만, 누구나 올 수 없다는 점에서 을지로의 공간들은 더욱 특별함을 갖는다.



사실 마냥 예쁘고 세련된 공간을 원한다면 반드시 을지로에 올 필요는 없다. 그런 가게들은 이미 여타 지역에도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매력은 을지로를 채우고 있는 기존 콘텐츠가 핵심이다. 다른 지역에서라면 평범해 보일 법한 것도 을지로에서라면 비상한 무언가로 보이게끔 만드는 힘. 이는 이 지역의 ‘오래된 것’들이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업을 꾸려온 이들과 그들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활기와 피로감은 특유의 독특한 양감을 완성한다. 이처럼 변치 않고 오래된 것에 공감하고 이를 직접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을지로의 인기를 견인하는 또 다른 한 축이 된다.

그동안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천편일률적인 세련된 공간에 싫증과 피로를 느낀 이들은 오히려 외피만 그럴싸한 게 아닌, 더욱 깊고 진한 콘텐츠를 찾는다. 예를 들어 음식점을 선택할 때도 SNS상에서 활발히 소비될 법한 트렌디한 멋보다 근본적인 맛을 더욱 중요시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경우 오랫동안 영업해온 전통 있는 맛집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영업한 지 40~50년을 훌쩍 넘은 맛집이 동네 곳곳에 숨어 있는 을지로의 매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우래옥, 을지면옥, 조선옥, 동원집, 을지오비베어 등의 노포가 중장년층인 기존 단골과 더불어 젊은 층의 소구력에 힘입어 세대를 넘어 고르게 사랑받는다. 실제로 젊은 층 사이에서는 ‘노포 클럽’을 결성해 오래된 식당만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있을 정도인데, 이들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을지로 지역의 노포가 매번 빠짐없이 등장한다. 젊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런 숨은 맛집을 찾아내고 즐길 줄 아는 자신을 남다른 미식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차별화하는 데서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새롭고 젊은 감각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오랫동안 단단히 버텨온 기존의 문화이다. 이중 어느 한 가지만 있었다면 을지로가 사람들에게 이토록 매력적인 지역으로 다가오진 않았을 게 분명하다. 결국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면서 낯선 요소가 한데 혼재된 상황이 오늘날 을지로의 독특한 정체성이고, 이 오묘한 공존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을지로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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